인민혁명당 사건
사건 · 정치·외교 · 1964년 8월 14일 ~ 2013년 11월 28일 · 37.5555, 126.9866
1964년 8월 중앙정보부가 한일회담 반대 시위의 배후에 북한 지령을 받은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발표한 공안 사건(1차 인혁당 사건). 담당 검사들이 기소를 거부할 만큼 증거가 약했고, 2013년 재심에서 관련자 9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상세 타임라인
개요
인민혁명당 사건(1차 인혁당 사건)은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발표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 조직이 한일회담 반대 학생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건은 수사 단계부터 고문 의혹과 증거 부족 논란에 휩싸였고, 결국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는 빠진 채 반공법 위반으로 축소되어 재판이 진행되었다. 10년 뒤 같은 사람들 일부가 다시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기소되어 사형을 당하면서, 1964년 사건은 '1차 인혁당 사건'으로 불리게 되었다.
배경
4·19 혁명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민민청),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 같은 혁신계 청년·통일운동 단체가 활발히 활동했다. 5·16 군사 정변 직후 군사정부는 이들 단체의 주요 인사를 예비검속하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 적용해 처벌했다. 1964년 봄에는 굴욕적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대학생 시위가 3월 24일부터 확산되어 정권 퇴진 요구로까지 번졌고, 정부는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인혁당 사건 발표를 이런 위기 국면에서 시위의 배후에 북한과 연계된 조직이 있다고 내세운 대응으로 설명한다.
경과
- 발표와 송치: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관련자 57명 가운데 41명을 구속해 검찰에 송치했다고 발표했다. 도예종은 같은 해 7월 시위 배후 조종 혐의로 이미 수배 중이었고, 발표에서 '부책'으로 지목되었다.
- 검사들의 기소 거부: 사건을 맡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 이용훈·김병리·장원찬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공소장 서명을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 그러나 검사장이 정명래 검사에게 기소하게 하면서 기소가 강행되었고, 이 문제는 국회 본회의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 고문 폭로: 1964년 9월 12일 한국인권옹호협회장이던 박한상 의원(변호인)은 구속기소된 도예종 등 26명의 피고인 대부분이 중앙정보부에서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 공소 취하와 혐의 변경: 1964년 10월 검찰은 26명 가운데 14명의 공소를 취하해 석방하고, 남은 12명과 추가 구속한 양춘우 등 13명에 대해 죄명을 국가보안법 위반에서 반공법 위반(북한 고무·찬양)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국가 변란 기도'라는 발표의 핵심 혐의는 재판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재판
- 1심(1965년 1월 20일): 재판부는 도예종·양춘우 2명에게만 반공법 제4조 제1항을 적용해 각각 징역 3년과 2년을 선고하고 나머지 11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들이 서클을 만든 사실은 인정되지만 북한의 통일 방안에 동조하는 인민혁명당 강령 심의에 참여한 사실은 없다는 취지였다.
- 2심(1965년 5월 29일): 검찰 항소로 열린 항소심은 원심을 깨고 13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위키백과는 도예종·양춘우·박현채 등 6명이 징역 1년 실형, 5명이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정리하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인민혁명당 사건」 항목은 도예종에게 징역 3년이 선고되었다고 적는 등 자료마다 형량 기술이 조금씩 다르다.
- 확정(1965년 9월 21일):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해 형이 확정되었다.
진상 규명과 재심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이 사건 당시의 불법 구금 등 인권침해 사실을 규명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련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재심을 청구했고, 2013년 11월 28일 서울고등법원은 재심에서 도예종 등 당시 유죄가 확정되었던 9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진실화해위원회와 국회 조사 자료 등을 볼 때 인혁당이 강령을 갖춘 구체적 조직이었다는 사실이 증명되지 않고, 고문의 흔적과 접견 차단 상태의 수사 등 국가의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위키백과는 기소된 13명 가운데 재심으로 무죄를 받은 것은 9명이고 4명의 유죄 판결은 그대로 남아 있다고 정리한다.
영향과 의의
1차 사건은 정권이 학생 시위를 '북한 배후론'으로 설명하려 한 초기 사례이자, 현직 검사들이 공개적으로 기소를 거부한 드문 사례로 남았다. 사건에 관여한 인물들이 10년 뒤에도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점도 자주 지적된다. 1964년 검찰총장 신직수는 1974년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발표했고, 1964년 법무부 장관 민복기는 1975년 사형을 확정한 대법원의 대법원장이었다. 또 1964년 사건을 수사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과장 이용택은 1974년 수사를 지휘한 6국장이었다(프레시안 서중석 대담). 이 때문에 1964년 재판에서 무너진 '인혁당' 혐의가 1974년 '재건위'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설·논쟁
1차 사건 관련자였던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2010년 무렵 저서와 인터뷰에서, 1963년 입당할 때 문서로 된 강령과 규약을 보았고 입당 선서도 했다며 인혁당이 실제 조직이었다고 증언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도 비슷한 주장을 폈다. 이들의 증언은 1964년 사건에 관한 것이지만, 2012년 대선 과정에서 1974년 재건위 사건과 혼동되어 "인혁당 사건에는 두 개의 판결이 있다"는 논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반면 재심 법원은 강령을 가진 조직의 실체가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조직의 성격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수사 과정의 고문과 증거 부족에도 기소가 강행된 점은 진실화해위원회와 재심 법원이 함께 확인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