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사건 · 전쟁·전투 · 1968년 10월 30일 ~ 1968년 12월 28일 · 37.1480, 129.3600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군부대 무장공비 120명이 세 차례에 걸쳐 경북 울진과 강원 삼척 해안으로 침투한 사건. 약 두 달간의 소탕전 끝에 113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되었다. 한국 측에서도 군경과 민간인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상세 타임라인
개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 사이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산하 124군부대 무장공비 120명이 경상북도 울진군과 강원도 삼척군 해안으로 침투한 사건이다. 이들은 태백산맥 일대에 유격 근거지를 세우려 했다. 한국 정부는 군·경찰·향토예비군을 동원해 12월 28일까지 약 두 달간 소탕 작전을 벌였다. 같은 해 1월의 1·21 사태, 푸에블로호 사건과 함께 1968년 한반도 위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며, 6·25 전쟁 정전 이후 북한의 침투 가운데 가장 큰 규모로 꼽힌다.
배경
196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베트남전의 게릴라 전술을 본뜬 무장간첩을 대거 남파했다. 당시 보도로는 1967년 한 해에만 8월까지 무장간첩 300여 명이 출몰했고, 1968년 8월 말 간첩대책본부는 그해 사살된 무장간첩이 156명이라고 발표했다. 1월 21일 124군부대 31명의 청와대 습격 시도 뒤, 한국 정부는 4월 향토예비군을 창설하는 등 대간첩 태세를 강화했다.
침투
생포된 공비들의 진술에 따르면 침투조는 15명씩 8개 조로 편성되어 원산에서 배로 출발했다.
- 1차(10월 30일): 2개 조 30명이 울진군 북면 나곡리 해안으로 상륙했다.
- 2차(11월 1일): 2개 조 30명이 울진군 북면 고포 해안으로 상륙했다. 이 조는 7월부터 평양 등지에서 석 달간 유격 훈련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 3차(11월 2일): 4개 조 60명이 삼척군 원덕면 월천리 고포 해안으로 상륙했다. 해안 경계병에게 발견되었으나 조치가 미흡해 침투를 막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공비들은 산간 마을에 나타나 주민들을 모아 놓고 북한을 선전했다. 노동당 입당을 강요하고, 저항하거나 신고하려는 주민을 살해했다. 11월 3일 새벽 울진 북면 고수동 주민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차례로 울진경찰서에 신고하면서 군경 출동이 시작되었다.
소탕 작전
대간첩대책본부는 11월 4일 정오 강원도와 경상북도 일부에 '을종사태'를 선포하고 11월 5일 침투 사실을 처음 발표했다. 국군과 경찰, 향토예비군이 동원되었다. 주한미군 헬기 부대도 병력 수송을 지원했다. 공비들은 소탕망을 피해 울진·삼척에서 봉화·명주·정선·평창·영월·양양·인제 방면으로 북상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가 이어졌다. 12월 9일 평창군 진부면(현 용평면) 노동리 계방산 기슭에서는 이승복 사건이 일어났다.
중간 발표를 보면 11월 13일까지 공비 28명, 11월 29일까지 58명이 사살되었고 2명이 생포되었다. 12월 25일 0시 을종사태가 해제되었고, 12월 28일까지 113명 사살, 7명 생포로 작전이 끝났다. 신문 보도를 모은 일지로는 110명 사살, 5명 생포, 2명 자수, 1명 시신 발견으로 집계되기도 한다.
피해
피해 집계는 자료마다 다르다. 11월 29일 대간첩대책본부 발표로는 이미 군인 33명(예비군 6명 포함)과 민간인 16명이 숨졌다. 1996년 서울신문은 당시 피해를 군인 38명 사망·67명 부상, 민간인 23명 사망·7명 부상으로 정리했다. 위키백과 영어판은 한국 측 사망자를 민간인 23명을 포함해 63명으로 적고, 미군 3명이 숨졌다고 한다.
결과와 영향
유엔군사령부는 12월 10일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이 사건을 휴전 이후 최대 규모의 정전 협정 위반으로 규탄하고 노획 장비와 증거물을 제시했다. 북한에서는 1968년 말 민족보위상과 총참모장, 대남 공작 책임자 등이 숙청되었고, 이후 침투 방식이 대규모 부대에서 소규모 조로 바뀌었다는 분석이 있다. 한국에서는 예비군 무장 강화, 벽지 주민 이주와 통신 시설 확충, 해안 경계 강화가 추진되었다. 미국의 추가 군사 원조와 M16 소총 공장 건설 계획도 뒤따랐다. 반공 교육도 크게 강화되어 이승복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렸다. 이 시기의 안보 위기가 1969년 삼선 개헌 논의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