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사건
사건 · 정치·외교 · 1968년 4월 ~ 2026년 6월 · 37.3930, 126.4050
1968년 북한 침투용으로 창설된 684부대(실미도 부대) 공작원들이 1971년 8월 23일 기간병을 살해하고 서울로 향하다 대방동에서 군경과 교전 끝에 대부분 숨진 사건이다. 생존자 4명은 1972년 비밀리에 처형·암매장됐고, 2006년 국방부 과거사위와 2022년 진실화해위가 국가의 불법과 은폐를 확인했다.
상세 타임라인
개요
실미도 사건은 인천 앞바다 무인도 실미도에서 북한 침투 훈련을 받던 공군 2325부대 209파견대, 흔히 '684부대'로 불린 부대의 공작원들이 1971년 8월 23일 섬을 탈출해 서울로 진입하려다 서울 대방동에서 군경과 교전 끝에 대부분 사망한 사건이다. 정부는 사건 직후 이들을 '무장공비'나 '군 특수범'으로 발표했으나, 2006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와 2022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는 공작원 31명이 모두 민간인이었고 국가가 이들을 속여 모집한 뒤 장기간 인권을 침해했으며, 살아남은 4명을 처형한 뒤 시신을 가족에게 돌려주지 않고 암매장했다고 판단했다.
배경
1968년 1·21 사태(김신조 등 북한 무장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 미수) 직후, 중앙정보부가 주도하고 공군이 지원·관리하는 보복 침투 부대가 같은 해 4월 창설됐다. 공작원 수는 1·21 사태 때 넘어온 북한 공작원 수와 같은 31명이었다. 국방부 과거사위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창설됐다는 진술은 있으나 이를 직접 뒷받침하는 문서는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과거사위 조사에 따르면 모집 과정에서 공작원들에게 훈련 후 장교 임관, 임무 뒤 원하는 곳 배치, 미군 부대 취업 같은, 실제로는 이행할 수 없는 조건이 구두로 제시됐고 침투 임무의 위험성은 알리지 않았다. 처음 석 달가량은 급여와 처우가 지켜졌으나 이후 급여가 끊기고 편지·외출·휴가가 막힌 채 3년 4개월 동안 섬에 사실상 갇혀 지냈다. 훈련 중 7명이 숨졌는데, 과거사위는 1968년 7월 탈영을 시도한 2명이 구타로 사망했고, 1970년에는 상부 지시를 받은 동료들에게 살해되거나 방치돼 숨진 사례가 있었다고 확인했다. 그 사이 남북 관계가 대화 국면으로 바뀌면서 침투 계획은 사실상 폐기됐다.
전개
1971년 8월 23일 새벽(위키백과 기준 오전 6시 무렵) 공작원 24명이 기간병들을 공격해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왔다. 이들은 낮 12시 20분 무렵 인천 옥련동 해안에 상륙해 시내버스를 빼앗았고, 군경과의 총격으로 타이어가 파손되자 다른 버스를 탈취해 서울로 향했다. 오후 2시 15분 무렵 서울 영등포구(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앞에서 군경에 저지당했고, 교전 중 버스 안에서 수류탄이 터지며 대부분이 숨졌다. 과거사위 집계로 이날 공작원 20명, 민간인 6명, 경찰 2명, 군인 18명 등 4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다쳤다. 공작원의 사망 경위(자폭·교전)와 세부 인원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다.
재판과 처형
중상을 입고 생포된 공작원 4명은 1971년 12월 6일 공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초병살해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2월 21일 항소가 기각된 뒤 상고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이들은 1972년 3월 10일 서울 오류동의 옛 공군 정보부대 사격장에서 총살됐다. 재판은 비공개였고 가족에게는 체포 사실도, 사형 집행 사실도 알리지 않았으며 시신도 인도하지 않았다.
진상 규명
1999년 소설과 2003년 영화 「실미도」로 사건이 널리 알려지자 국방부는 2004년 공작원 일부의 신원을 확인했고,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2006년 7월 13일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과거사위는 공작원들이 정부 발표와 달리 사형수나 중형수가 아닌 민간인이었다고 밝히고, 탈출 과정의 살상은 범죄이지만 적법 절차 없이 장기간 인권을 침해한 정보기관과 국방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관련 사망자는 훈련 중 7명, 탈출 당일 46명, 처형 4명 등 모두 57명으로 집계됐다. 공군 부대가 사건 당일과 1998년 공작원 인사기록 등을 소각한 사실도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유족 사과, 사망 통지, 처형된 4명의 유해 수습을 권고했다.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2022년 9월 20일 '실미도 부대 공작원 유해 암매장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리고, 처형된 4명이 묻혔을 가능성이 가장 큰 곳으로 벽제리 묘지 5-2구역을 지목했다. 이어 11월 29일에는 '재판청구권 침해 등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공군이 이행할 수 없는 조건으로 민간인을 속여 모집했고, 사형수들에게 월남 파병을 거론하며 상고 포기를 회유했다고 판단해 국방부와 국가정보원의 사과, 재판청구권 회복 조치, 위령비 건립 등을 권고했다.
사과와 유해 발굴
국방부는 2023년 5월 벽제리 묘지 5-2구역을 발굴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다. 2024년 10월 15일 같은 곳에서 개토제를 열며 국방부 장관 명의로 사건 53년 만에 처음 공식 사과했고, 진실화해위 조사 결과를 존중해 권고를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때의 발굴에서도 유해는 나오지 않았다. 2026년 5월 18일 다시 개토제를 연 뒤 벽제와 오류동 옛 공군 부대 터를 발굴했지만 6월까지 유해를 찾지 못했다고 보도됐다. 2026년 6월에는 당시 공군 검찰부장이 국방부가 헌병대에 사형수들의 베트남 파병 명령을 내려 상고 포기를 유도했다고 증언했다(한겨레).
영향과 이설
유족들은 영화가 공작원들을 범죄자로 그렸다며 바로잡기를 요구해 왔다. 처형된 4명의 매장지에 대해서는 대방동설, 오류동설, 벽제설 등 진술이 엇갈리며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부대 운영비 횡령 의혹은 과거사위와 진실화해위 모두 확인하지 못했다.